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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별서

명승 제 118호

조선 고종 당시 내관이자 문인인 황윤명이 조성하였고,

경승지로 이용이 되었으며, 갑신정변 당시 명성황후의 피난처였다.
얼마 남지 않은 조선시대 민가정원으로서 학술적 가치로 인정을 받고

성락원에서 성북동 별서로 재지정 되었다.

공간 설명

성북동 별서: 투어
앵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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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쌍류동천

두 갈래의 계류가 합쳐지는 곳에 펼쳐진 신선의 영역

2.  용두가산

내원을 아늑하게 감싸서 깊이를 주기 위해 만든 인공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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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본제

살림살이가 가능했던 건물

4.  영벽지

장빙가: 겨울에 고드름이 달려있는 집, 완당이라는 호가 각자 되어있어 김정희의 글씨이다.

명월송간조: 밝은 달빛은 소나무 사이에 비치고, 맑은 샘물이 바위 위로 흐르네

성락원 계류: 자연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최소한의 인공이 가미되었다.

청산일조: 소나무로 울창하게 뒤덮여 있는 아름다운 산세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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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락원 사진.jpg

5.  송석정

정자,연지 함께 위치, 조선시대 선비들의 연회장

-송석: 못 북쪽 계류가에 ‘松石(송석)’이란 각자가 있어 원래 이 못가 바위 사이에 큰 소나무들이 울창했음을 알 수 있음.

앵커 2
앵커 3
앵커 4
앵커 5
성북동 별서: 사진
성북동 별서: 환영 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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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별서" 

  이야기


 10여 년 전 국가문화재인 ‘명승’으로 지정됐다가 문화재급 가치가 희박하다는 비판이 잇따르면서 논란을 빚었던 서울 성북구 성북동 전통 정원 ‘성락원’이 ‘성북동 별서’로 이름을 바꿔 명승으로 재지정되었다. 

 그 이유는 명승 35호인 성락원이 조선 철종때 이조판서 심상응이 조성한 것이 아니라 고종때 내관이자 문인 황윤명이 조성한 것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지난해 성락원에 대한 역사적 증거가 부실하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성락원의 문화재적 가치를 재검토했다.  그 이후 문헌 검토와 현지 조사를 마친 문화재위원회는 “이 공간이 고종 이전에도 경승지로 널리 이용됐고, 얼마 남지 않은 조선시대 민가 정원으로서 학술적 가치도 인정된다” 라고 판단이 되어 황윤명의 유고 문집‘춘파유고’ 에 기술된 내용 등을 고려해서 서울 성북동 별서로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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